제목 | 2010년 3월의 호국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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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산부 | 등록일 | 2010-03-03 | 조회수 | 2652 |
파일첨부 | monthlyp_2010022610240337.jpg | ||||
1876년 3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장인환 선생은 일찍이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학업을 중단하고 상점 점원 등을 하며 어렵게 지내다가 1904년 하와이 노동이민으로 도미했다. 2년 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1907년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1908년 3월, 당시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휴가차 귀국하여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고 한국을 비난하는 망언을 하자 한인 대표들이 그를 찾아가 정정 보도와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가 사과는커녕 무례한 태도로 ‘이완용 같은 충신과 이등박문 같은 통감이 있음은 한국의 행복이요 동양의 행복이다’ ‘한국의 인민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는 등 궤변을 서슴지 않자 장인환 선생은 스티븐스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3월 23일,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 페리역에 도착하는 것을 본 선생이 거사를 벌이려는 순간 또 다른 한국인 청년 전명운(田明雲)이 먼저 스티븐스를 저격했고 이것이 불발되자 스티븐스에게 달려들어 격투를 벌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선생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발을 쏘아 그 중 스티븐스의 등에 두발을 명중시켰다. 치명상을 입은 스티븐스는 이틀 뒤 탄환제거 수술을 받던 중 사망했다. 선생의 스티븐스 저격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 불길을 당겨 이후 안중근, 이재명, 윤봉길 의사의 거사로 이어졌다. 선생은 미국법정에서 280일간의 치열한 공판투쟁 끝에 2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모범적인 수형생활과 동포사회의 끈질긴 석방운동으로 10년만인 1919년 1월 가석방되었다. 1927년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뒤 1930년 5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병원에서 55세로 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1975년에 유해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