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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9년 3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전산부 등록일 2009-03-02 조회수 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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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황희(黃喜) 정승의 5대손으로 태어난 황진 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행동이 민첩했으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겼다.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 거산도찰방 등을 역임했다. 1590년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등을 따라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귀국한 후에는 밤낮으로 무예를 익히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했다.

동복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의 휘하에서 참전했으나 용인에서 패전했다. 그러나 이후 진안에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안덕원과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그 공으로 익산군수 겸 충청도조방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패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동안 연승을 거두었다.
1593년 6월, 적장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일년 전 진주성 싸움에서 패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 군사를 총동원하여 진주성을 공략하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절도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성에 들어가 항전했다. 황진 장군은 9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수 차례씩 왜군과 혈전을 벌여 셀 수 없이 많은 적을 사살했으나 안타깝게도 적병의 저격을 받아 전사했다. 장군이 전사한 후 성은 함락되었지만 이 진주성 싸움은 적의 기세를 크게 꺾어 왜군의 호남 침입을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순찰사 이상신(李相信)과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공이 살아 있을 때 성이 보존되고, 죽으니 성이 함락되었다’, ‘수성(守城)에 대해서는 황진이 천하의 으뜸’이라 했을 만큼 그는 군민이 다 같이 칭송하는 명장이었다. 왜란 후 죄찬성에 추증되었고, 진주 창렬사(彰烈사), 남원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무민(武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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