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09년 2월의 호국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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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산부 | 등록일 | 2009-01-30 | 조회수 | 3126 |
파일첨부 | monthlyp_2009013015242004.jpg | ||||
정봉수 장군은 1592년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이 되어 왕을 호종한 공로로 부장(部將)이 되었으며, 1605년에는 흑산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를 격멸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군이 용천부(現 평안북도 용천)를 공격하여 용천부사 이희건이 전사하자 성민들은 당시 용골산성에 피난해 있던 정봉수 장군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이에 장군은 4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는 등 전열을 재정비한 후 후금의 기병부대를 섬멸하고 수천 명의 포로를 구출하는 큰 전공을 거두었다. 크게 패한 후금군은 인근의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용골산성을 재차 공격했으나 정봉수 장군과 의병들은 활과 총포로 결사항전하여 적군을 퇴각시켰다. 이 공으로 정봉수 장군은 철산부사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용천부사 겸 방어사, 의주부윤을 겸직하게 되었다. 퇴각 후에도 계속 항복을 요구하며 회유하던 후금군이 병력 1만여 명을 재집결하여 총공격을 감행해 왔으나 정봉수 장군과 의병의 항전에 또 다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철수했다. 이후 장군은 전라좌수사를 거쳐 경상도, 전라도 병마절도사, 청북방어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철산의 충무사(忠武祠)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양무(襄武)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