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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8년 2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전산부 등록일 2008-02-01 조회수 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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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난 오동진 선생은 19세가 되던 해,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후 귀향하여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 교육계몽 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체포령이 내려지자 이를 피해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만주에서 윤하진·장덕진·박태열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1920년 조선의 실질적 군대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이 조직되자 총영장이 되어 독립군을 편성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해에 미국 국회의원단이 시찰단으로 국내에 입국하자 요원들을 평양, 신의주, 서울로 파견하여 일제의 기관과 주요시설을 파괴함으로써 국제사회에 민족의 독립의지를 알렸으며 이 사건으로 궐석재판을 통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22년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자 선생은 군사위원장이 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했으며 1925년 이청천, 김동삼 등과 함께 남만지역에 산재한 독립투쟁 조직들을 총망라한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여 군사위원장이자 총사령관으로서 독립군을 총지휘, 한·만 접경지역의 일본 경찰관서를 습격 파괴했다.

당시 일제 평북경찰부의 통계에 의하면 1927년까지 선생은 연인원 14,149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일제 관공서 습격 143회, 일제 관리와 밀정 살상 914명이라는 놀랄만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로 인해 김좌진, 김동삼 선생과 함께 독립투쟁계의 3대 맹장으로 불릴 정도로 활발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선생은 1927년 12월, 변절한 옛 동지의 밀고로 체포되었고 국내로 압송되어 6년 여의 재판끝에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수감되어서도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고 48일간의 단식을 벌이는 등 옥중투쟁을 계속하자 일제는 선생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붙여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되는 공주형무소로 이감했고, 선생은 이곳에서 모진 옥고 끝에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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