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월의 호국인물 | ||||
---|---|---|---|---|---|
작성자 | 전산부 | 등록일 | 2005-01-03 | 조회수 | 3547 |
파일첨부 | 2005_jan_ko.jpg | ||||
휴정 의승장은 1520년(중종 15년)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별호로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있으며 법명이 휴정이다. 1534년 지리산에 입산, 숭인(崇人) 문하에서 승려가 되었고 일선(一禪) 등에게 구족계(具足戒 출가한 비구·비구니가 지켜야할 계율)를 받았다. 1552년(명종 7년) 승과에 급제, 중덕·대덕을 거쳐 교종판사, 선종판사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에 이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구국의 방법을 묻자 73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했으며 자신도 의승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께 평양을 탈환하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이에 선조가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惟政)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참선에 매진했다. 한양에 돌아온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 (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하여 그의 공적을 치하했다. 이후 참선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던 중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설법을 마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했다. 그의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휴정은 승군활동으로도 명성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양성한 제자만 해도 사명당 유정을 비롯, 1천여 명에 달하는 등 조선시대 불교계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가 서고, 해남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청허당집(淸虛堂集)』『선교석(禪敎釋)』『선교결(禪敎訣)』『운수단(雲水壇)』『삼가귀감(三家龜鑑)』『심법요초(心法要抄)』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