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2월의 호국인물 | ||||
---|---|---|---|---|---|
작성자 | 전산부 | 등록일 | 2004-12-01 | 조회수 | 3540 |
파일첨부 | ko_dec.jpg | ||||
정기룡 장군(1562.4.24 ~ 1622.3.7)은 1562년(명종 17년) 경남 곤양에서 태어나 1586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 훈련원봉사를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別將)으로 승진, 우방어사 조경(趙儆)의 휘하에 종군하여 거창싸움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금산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한 뒤 곤양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왜군의 호남진출을 막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이어 상주판관에 부임해 왜군과 격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했으며 이후 회령부사, 상주목사, 통정대부를 역임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왜군을 대파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며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 경주와 울산을 탈환했다.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직을 대행하여 영남지방의 왜군 잔당을 소탕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같은 전공으로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정기룡’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육전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60여 회나 치르면서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력으로도 단 한 번 패한 적이 없었던 명장이었다. 50명의 기병으로 수천 명의 왜적을 격파한 적도 있으며 뛰어난 지략으로 겨우 400명 뿐인 군사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적 십만 명을 이틀 동안 꼼짝 못하게 하여 수십 만 백성들을 피난시켜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왜군이 쳐들어오는 관문에 위치한 경상도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것은 정기룡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투에서는 항상 선두에 서서 적진에 돌격했으나 부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명나라 군과의 합동전투에서는 명나라 부총병(副摠兵)이 전사하자 장군의 지략과 용맹함에 감동한 명나라 군사들이 모두 정기룡 장군의 휘하에 소속되기를 원하자 명나라 황제가 이를 허용했을 정도였다. 더구나 장군은 전리품인 수급은 휘하에 소속된 명나라 군사에 나누어 주거나 식량으로 바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등 큰 덕을 베풀어 인근에 흩어졌던 백성들이 장군이 주둔하던 상주로 모여들었고, 장군이 군사를 모집하면 모두 목숨을 던져 싸우겠다고 몰려들었다. 임란 후 1601년 경상도방어사, 김해부사, 밀양부사를 거쳐 도위도총부총관,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를 역임했으며 1617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재직 중 1622년 통영 진중에서 병사했다. 상주 충렬사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