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열강의 침략에 맞서다
어재연(魚在淵) 조선 장군
General Eo Jae-yeon
(1823[순조 23]. 3. 15. ∼ 1871[고종 8]. 6. 11.)
조선말기의 무장으로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자는 성우(性于)이며 경기도 이천 율면에서 아버지 어용인(魚用仁)과 어머니 유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 서울 동작진에 올라와 수학(修學)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체격이 장대하고 힘이 좋았다.
1841년(헌종 7) 19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광양현감(光陽縣監), 풍천부사(豊川府使), 장단부사(長湍府使) 등을 역임했다.
1866년(고종 3)에 공충도(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는데 그해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강화도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며 공충도의 방비에 힘썼다.
그 후 회령부사(會寧府使)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치안을 다스리며 별포대(別砲隊)를 설치해 국경 수비를 튼튼히 했다.
1871년(고종 8) 로저스 제독(Rodgers 1812~1882)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손해 배상을 구실로 강화도를 침략,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이때 어재연 장군은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광성보로 급파되었다.
같은 해 6월 10일(음 4월 23일) 미군은 강화도 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에 이어 6월 11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다음 총공격으로 물밀듯 광성보를 향해 육박해 들어왔다.
그들은 함정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를 필두로 일제히 함포사격을 퍼부으며 광성보를 점령하고자 돌격을 시작했다.
당시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였던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전투가 백병전의 단계에 이르자 어재연 장군은 손수 장검을 빼어들고 군사들과 함께 적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전세는 기울어 어재연 장군은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광성보를 점령한 미군은 조선군의 수자기를 비롯하여 군기 50개, 각종 화기 등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로저스 제독의 아시아함대는 강화도 요새지를 함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철수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조정에서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어재연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려 충장공(忠壯公)의 시호와 함께 병조판서를 추증(追贈)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