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호국인물 임병래(任炳來) 해군 중위
임 중위는 1922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나, 1950년 4월 20일 사관후보생 9기로 임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자 8월 13일 해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첩보수집부대를 편성했다.
해군첩보부대는 임병래 중위 등 정보장교가 포함된 17명으로 구성되어, 8월 17일 부산에서 출발했다. 이어 8월 22일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에 상륙한 첩보부대는 3개의 조로 나누어 활동을 개시했다. 임병래 중위는 인천으로 잠입하여 밤낮으로 영흥도와 인천을 오가며 첩보활동을 지휘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그는 인천에 남아있던 공작원들과 접선하여 서울 지역까지 첩보 영역을 확대했다.
같은 해 9월 1일, 맥아더사령부 정보부에서 파견한 클라크 해군대위의 첩보대가 영흥도에 도착하자, 해군첩보부대는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미군 정보부로 전달했다. 그들이 보낸 정보는 인천의 적 병력·보급관계·기뢰부설 현황·상륙지점의 지형과 암벽의 높이 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결정적인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9월 14일, 해군첩보대원들은 북한군에게 포위됐다. 임 중위는 홍시욱 이등병조와 함께 나머지 첩보대원들을 탈출시키고자 끝까지 맞서 싸우다, 작전의 기밀 유지를 위해 최후의 순간 권총으로 자결하였다.이 사건을 모티브로 2016년 '인천상륙작전'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고(故) 임병래 해군중위와 해군첩보대원들은 영흥도 일대에서 상륙에 필요한 핵심 첩보를 수집해 해군본부와 미 극동사령부에 전달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1954년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으며, 2013년에는 해군의 유도탄 고속함 10번함을 임병래함으로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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