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9년 4월의 호국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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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산부 | 등록일 | 2019-04-04 | 조회수 | 63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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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호국인물 1532년 전라남도 화순읍 삼천리에서 태어난 최경회 장군은 고려 명재상 최충의 후손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일휴당(日休堂)이다. 고봉 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56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67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을 역임 했고 장수(長水), 무장(茂長) 등의 현감을 거쳐 영암 군수, 담양 부사 등을 지냈다. 장군이 모친상으로 화순 향제(鄕制)에 기거 중이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라좌도 의병 진영의 권유를 받은 그는 상복 차림으로 단상에 올라 의병장이 되었다.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자 화순과 능주 등에서 8백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으며 장군의 일가(형제, 조카, 아들 등)도 의병에 동참했다. 장군의 의병부대는 담양과 순창, 남원을 거치며 군세가 불어나 전부장, 후부장, 좌우부장을 임명하는 등 의병진영체계를 갖추게 되어 ‘우의병(右義兵)’이라는 부대명도 얻게 되었다. 전라 우의병은 금산전투, 무주대첩 등에서 대승하며 공을 세웠다. 최경회 장군은 왜군들이 호남을 점령하기 위해 진주성 으로 집결하자 우의병을 이끌고 진주 살천에 주둔하면서 진주 목사 김시민과 함께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종후와 함께 촉석루에 올라 임금의 처소인 북쪽을 향해 4배(四拜)를 한 후 스스로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殉節)했다. “최경회는 동서로 적을 초토하느라 1년 넘게 노숙했으나 뜻이 조금도 태만해지지 않았다. 우병사로 승진되어서는 처사가 정밀하고 민첩했으며, 호령이 엄하고 분명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했다.” 1593년 6월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내용이다. 최경회 장군은 후에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었고 진주 창렬사(彰烈祠), 능주 포충사(褒忠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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