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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9년 3월 호국인물
작성자 전산부 등록일 2019-03-06 조회수 6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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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호국인물



강우규(姜宇奎)의사



(1855. 7.14 ~ 1920. 11. 29)



강우규 선생은 1855년 7월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가난한 농가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호는 왈우(曰愚)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과 한의학을 공부해 한의사로 활동했다. 이후 함경남도  일대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상당한 재산이 모이자 사립학교와 교회  등을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50대 초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911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여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이 시기에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많은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연해주 일대에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선생은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해 터를 잡고 이곳을 ‘신흥동(新興洞)’이라 명명했다.



선생의 노력으로 신흥동은 불과 1년여 만에 100여 호가 넘는 한인마을로 성장했고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을 연결하는 거점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선생이 만세시위에 호응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뛰어들게 하는 계기가 됐다.



선생은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해 요하현 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가 새로운 총독을 임명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총독 처단을 결심한다. 9월 2일, 환영행사에 참석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아쉽게도 피살에 실패하고 만다. 선생은 재차 거사를 계획하다,



의거 16일 만인 9월 17일 체포되어 1920년 2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강우규 의사의 모습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일제와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의거의 주인공이 64세 백발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기 전 아들 중건에게 남긴 유언이다.



정부는 독립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는 구국 의열 투쟁의 효시가 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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