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호국인물
김용식(金龍植) 육군 일병
Private First Class Kim, Yong-sik
1931. 2. 8 ∼ 1950. 9. 29
김용식 일병(추서 계급)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 이래 병사로서 최초로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12호)을 수여받은 전쟁영웅이다. 1931년 2월 8일 경기도 옹진군 부관면에서 태어나 강령초등학교와 옹진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5월 육군에 자원한 후 제주도훈련소를 거쳐 수도사단 제17연대 3대대 9중대 3소대에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소총수로서 낙동강 방어작전에 참전, 안강·기계지역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1950년 8월, 북한군은 경주시 안강읍 기계면 인근 비학산에서 정예부대인 12사단과 766유격부대를 재편성한 후 새로운 공격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수도사단은 제18연대를 투입해 여러 차례 군사적 요충지인 비학산을 빼앗기 위해 시도했으나 매번 실패해 결국 공격 작전권은 김용식 이병이 속한 제17연대로 넘어왔다.
17연대는 비학산 점령을 위해 먼저 야간기습으로 아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던 북한군 766유격부대를 습격하기로 결정하고 임무를 수행할 특공대를 선발하였다. 김용식 이병은 훈련소 동기인 홍재근 이병과 함께 제일 먼저 지원하여, 돌격작전의 첨병을 맡았다. 첫 작전에 투입된 김용식 이병은 대열의 선봉에서 은밀하게 적진에 침투해 적 경계병을 순식간에 처치했다. 그리고 다른 특공대원들과 함께 적 은거지를 기습 공격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1950년 8월 24일, 비학산 공격 때에도 김용식 이병은 돌격작전의 선봉에 섰다. 총탄이 빗발치는 적진을 향해 나아가던 중 우연히 적 자동화기 진지를 발견하고 측면 기습하여 적 군관 1명을 포함한 15명의 적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서울탈환작전을 수행한 직후 구리 백교리(現 교문동)에서 안타깝게도 적의 흉탄에 복부를 맞고 9월 29일 전사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무살이었다. 항상 가슴속에 태극기를 간직했던 김용식 일병은 뜨거운 애국심의 소유자였다.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51년 7월 군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1954년 10월에는 1계급 특진과 함께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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