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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전산부 등록일 2004-03-02 조회수 4086
파일첨부 20040301.jpg

김동삼 독립운동가 (1878.6.23~1937.3.3)
김동삼 선생은 187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일송(一松) 본명은 긍식(肯植)으로 훗날 만주에서 동북삼성(길림성, 봉천성, 흑룡강성)의 독립운동단체와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대동단결시키기 위해
이름을 동삼(東三)으로 고쳤다.

영남 유림의 본향인 안동에서 한학자의 맏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나 일찍이 계몽운동에 눈떠 그 실천방안을 모색하였고, 결국 1907년 보수적인 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인식·김후병 등과 함께 협동중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1909년에는 남형우·안희제 등과 함께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활동이 어렵게 되자 선생은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에 따라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로 건너간 선생은 1911년 이회영·이시영·이동녕·이상룡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뒤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 설립에 참여하여 독립군 양성에 앞장섰다. 1918년에는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 망명하고 있던 서일·여준·신팔균·김좌진 등의 지사들과 함께
39명이 연서하여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했고, 군정부가 상해임시정부의 휘하로 들어가 ‘서로군정서’로 개칭되자 참모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선생은 통의부 위원장, 상해 국민대표회 의장, 정의부 참모장 등을 역임하며 수십명의 일본경찰을 처단하는 등 독립운동의 선봉장으로서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으며 1926년에는 두차례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만주일대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선생은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1931년 10월 동지들과 함께 길림으로 가서 한·중간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논의하고 돌아오던 중 밀정의 밀고로 동지 이원일과 함께 하얼빈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 끝에 국내로 압송된 선생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7년 3월 “나라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당시 국내에는 선생의 연고가 없었고 또한 일제의 폭압이 극도에 이른 때라 누구 하나 나서서 선생의 사후처리를 하는 사람이 없자 소식을 들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달려가 선생의 주검을 거두어 자신이 머물던 서울 성북동 심우장으로 옮겨 장사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선생의 후손들은 해방 이후에도 만주에 머물며 조선족으로 살아오다 1989년 손자 김중생씨(72)가 노모(이해동 여사, 03년 8월 99세로 별세)와 함께 영구귀국했다.
김동삼 선생의 일가는 일제에게 효수형을 당한 아우 김동만(본명 김찬식)을 비롯하여 김영식, 김종식, 김장식, 김형식, 김문로, 김원로, 김인로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항일 명문집안이다.

3월 4일(목 14:00)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손자 김중생씨 등 후손을 비롯한 종친회 인사와 순국선열유족회, 독립유공자협회, 광복군동지회 등 독립유공단체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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