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응언(蔡應彦) 의병장
Righteous Army Commander Chae Eung-eon
(1883 ~ 1915)
한말 의병장으로 평남 성천(成川)에서 태어났다. 채응원ㆍ채응경ㆍ채도석으로도 불렸다. 대한제국의 육군보병(陸軍步兵) 부교(副校)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해산령이 내려지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의병에 투신하였다. 이진룡(李鎭龍) 의병장 휘하 부장(副將)으로 평안남도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적극적인 항일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에는 황해도 안평(安平) 순사주재소와 수안(遂安)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 헌병을 사살하였다. 다시 함경남도의 마전동(馬轉洞) 순사주재소를 급습하여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 뒤 1911년 이후로는 400여 명의 의병을 휘하에 두고 의병장이 되어 경기도ㆍ강원도ㆍ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 등 각도를 넘나들며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13년 6월에는 황해도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였으며, 일본수비대를 불질러 일본군 수명을 부상케 하였다. 또한 군자금을 조달키 위해 부유한 한인에게 항일독립사상을 고취시켜 협조토록 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격렬한 항일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채응언의 활약으로 인해 20여 명 이상의 일본헌병과 일제에 아부하던 친일파 밀정 등이 처단되었다. 일제는 그를 체포하고자 소위 ‘적괴 채응언수색대’를 조직하였다.
일제는 채응언을 체포하기 위해 1914년 9월부터 평양 헌병대에 대교(大橋) 헌병대장 휘하에 헌병 상등병과 보조원 4명을 1대로 하는 5개 체포대를 편성하였다. 또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일반인에게 밀고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러던 중 1915년 7월 5일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평남 성천군 영천면 처인리의 부호를 찾아갔다가 밀고로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7월 8일 평양헌병대 본부로 이송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은 뒤 평양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된 뒤 살인 및 강도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 받자 곧 항소하였다. 재판과정에서 살인·강도죄를 적용 받는 것에 불복하였으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간수가 없는 틈을 타 자신의 옷으로 끈을 만들어 목을 매 자결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9월 21일 평양 복심법원(覆審法院) 역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형을 확정하였다. 그러자 다시 상고하여 의적(義賊)의 명분으로 사형에 처해달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10월 28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결정이 내려지자 그 해 11월 4일 평양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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