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
장동출(張東出) 공군 대위
Capt. Jang Dong-Chul
(1925. 7. 20 ∼ 1950. 9. 10)
장동출 대위는 1925년 7월 20일 경북 예천군 예천읍 노상동에서 출생했다. 대구 상업학교 2년을 중퇴하고, 1948년 7월 22일 육군항공기지대에 조종하사관으로 입대한 후 1949년에 간부후보생 4기로 임관했다. 이후 육군항공기지사령부 비행부대 소속으로 본격적인 조종사의 길을 걸었다.
6·25전쟁 이전에는 태백산지구 공비토벌작전 및 옹진지구 북한군 충돌사건에 L-4 연락기 조종사로 참가했다. 1950년 2-3월경에 태백산지구, 5월에는 웅진지구 전투에서 정찰, 전단 살포, 지휘관 및 부상병 수송의 임무를 수행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외에도 1950년 5월에는 국민 성금으로 구매한 T-6 건국기 헌납 및 명명식에서 서울 상공을 편대 비행했다.
6·25전쟁 발발 당시 대한민국 공군이 보유 중이던 항공기로는 적 전차를 파괴하기 어려웠다. 적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전투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6월 26일 미 공군으로부터 10대의 F-51D 전투기 지원이 결정되었다. 이에 T-6 비행교육 이수자 중 별도의 훈련 없이 F-51D 전투기를 조종할 수 있는 10명을 선발했다. 공군 최초의 전투기 인수조종사로 선발된 장 대위는 일본 이다즈께(Itazuke, 板付)에 위치한 미 공군 기지에서 단기간의 비행교육만을 받은 후, 6·25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7월 2일 대구기지(K-2)로 복귀하였다.
F-51D 전투기의 첫 출격 임무는 1950년 7월 3일 대구에서 시작되었으며, 묵호, 영등포, 충주 등지로 남하하는 적 지상군부대에 공격을 감행해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동안 대구에서 출격작전과 훈련을 해오던 장 대위는 7월 29일 진해기지로 이동하여 낙동강 방어 작전에 참가했다. 이때 북한군 제6사단이 마산 방면으로 압박해오자, 미 제25사단은 근접한 비행단에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장 대위 등 F-51D 조종사들은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하동, 광양, 함양, 순천, 통영, 장성 등 주로 적 제6사단과 제7사단의 후방을 공격하여 차량과 야포진지 등을 파괴하고 지상군을 공격했다. 특히 8월 20일과 21일에는 진주 지역에 대한 정찰임무를 수행했으며, 하동과 함안 남서쪽 지역에서 아군과 대치중인 적 기관포 진지 및 차량과 병력에 대한 근접지원임무를 실시했다. 8월 22일부터는 군산, 목표 방면에서 적 해안 방어진지를 공격했고, 김천, 안동 지역으로 출격하여 적 보급차량과 보급품집적소를 파괴했다. 9월에도 근접 항공지원과 후방 차단 작전에 임하여 모두 15회의 적진 출격 임무를 마쳤다.
1950년 9월 10일 장 대위는 이상수 중위와 미군 조종사 윌슨 대위와 함께 청주 지역의 북한 지상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하던 중 원인 모를 기체결함으로 추락하여 전사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1951년 9월 28일)을 추서했으며 유해는 국립 서울현충원 17번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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