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호국인물
장철부(張哲夫) 육군 중령
Lt. Colonel Jang Chul-bu
(1921. 4. 17 ~ 1950. 8. 4)
장철부 육군 중령은 1921년 4월 17일 평안북도 용천군 동하면 법흥동에서 실업가인 김여주(金麗柱) 선생과 장익주(張益柱) 여사 사이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41년 정주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中央)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으로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치욕감을 느껴 중국 서주(徐州)에서 두 번의 탈출을 시도한 끝에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조국의 독립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본명 김병원(金秉元)을 장철부(張哲夫)로 개명했다. 이후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제1지대 제1구대 유격대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곧 하남성 필양현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습격하여 많은 군수품을 불태웠으며, 일본군 수송열차를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945년 3월 군사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김구(金九) 주석의 추천으로 중국 황포군관학교 기병과(20기)에 입교, 1947년 2월 졸업하였다. 귀국 후에는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에 입교하여, 1948년 4월 육사5기로 임관하였다. 이후 육사에 남아 구대장, 중대장, 전술학 교관 등을 역임하면서 후배들을 양성하였다.
1949년 10월 독립기갑연대 예하에 국군 최초로 기병대대가 창설되자 기병대대장(계급 소령)에 보직돼 근무하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1950년 6월 25일 장철부 소령의 기병대대는 의정부로 출동해 수색작전을 전개한 후 한강 이남으로 철수해 진지를 구축하고 6월 29일 한강을 도하하는 북한군을 공격해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 2일부터 4일까지 장철부 소령은 과천에서 한강을 도하하는 적의 선견대(先遣隊)를 공격해 적의 남하를 지연시켰고, 수원에서는 아군 부상병들을 말을 이용하여 후방으로 철수시켰다.
7월 11일에는 충남 공주 유구리 전투에서 북한군 제6사단 1개 대대를 섬멸하고 북한군 대대장의 지프를 노획했다.
7월 14일 미군 제26사단 63포병대대가 공주 남방의 삼교리에서 북한군에게 포위되자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구출작전을 성공시켰으며, 7월 15일에는 미군 제24사단 34연대 3대대가 적에게 포위되자 다시 적의 후방을 기습해 구출했다.
그러나 8월 4일 경북 청송지구에서 청송-경주로 진출을 기도하는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가 부상을 당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장철부 소령은 대대지휘소가 점령당하기 직전, 포로가 되는 수치와 불명예보다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장철부 소령의 공적을 기려 중령으로 1계급을 특진시키고, 1990년에는 독립운동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02년에는 다시 6?25전쟁 유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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