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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6년 10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10-04 조회수 6105
파일첨부 monthlyP_2016092816245318.jpg



10월의 호국인물

김교수(金敎洙) 육군 대위

Captain Kim, Gyo-soo

(1923. 6. 19 ~ 1953. 7. 14)



1923년 6월 19일 함경남도 함흥시 신보리에서 출생한 김교수 대위는 1950년 함흥시 소재의 흥남공업대학 화학부 2년을 수료한 후 월남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4월 육군종합학교에 입교, 8월 18일 제32기로 육군소위에 임관하였다. 이후 각 지구 전선에 참가한 후 제6사단 제2연대 2대대 6중대장으로 교암산지구 전투에 참가하였다.

1953년 7월 13일 휴전이 가까워지자 중공군은 중부전선의 요충지인 ‘금성 돌출부’를 탈취하기 위해 이른바 7ㆍ13공세라는 최후의 대공세를 개시하였다. 당시 6사단 2연대는 금성 남쪽 강원도 김화군 원동면 소재 교암산 방어를 담당하였다. 교암산은 금성천 동안의 아군 주저항선에서 가장 표고가 높아 인근의 야산지대를 한 눈에 감제할 수 있어 방어 편성상 핵심적인 고지였다. 아군이 이 고지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화천선까지 철수해야만 하는 방어진의 최대거점이었다.

7월 13일 밤 9시 중공군 제199사단의 주력 연대는 김교수 대위의 6사단 2연대 2대대 6중대가 담당하고 있는 교암산 ‘가’고지 전초진지에 파상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김교수 대위와 중대원들은 여섯 차례에 걸친 적의 습격을 육박전과 진내사격으로 물리치며 일진일퇴의 혈전을 거듭하였다.

7월 14일 또다시 시작된 적의 포화는 점차 그 강도가 더해갔고 적의 병력도 급속도로 증강되었다. 피아간의 일대 혼전과 함께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1개 연대 규모 이상의 적이 제6중대를 완전포위하게 되자 중대를 지휘하던 김교수 대위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포병의 진내사격을 요청하는 한편 중대원들에게 동굴로 대피할 것을 명령하였다.

즉각적인 아군 포병의 진내사격이 제6중대 진지인 ‘가’고지를 강습하였으나 적의 특공조는 비오는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도 참호와 동굴을 폭파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김교수 대위는 부하들에게 “이곳에서 앉아 죽을 수는 없다. 나가 싸우자!”고 외치며 얼마 남지 않은 수류탄을 투척하고 즉시 뛰쳐나가 선두에 서서 적과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적진으로부터 날아든 한 발의 총탄을 복부에 맞고 전사하고 말았다. 중대장을 잃고도 고군분투하던 중대원들은 결국 적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인해 대부분 전사하였고, 단지 6명만이 생환하였다. 김교수 대위와 중대원들의 분전은 좌우 인접부대가 돌파당한 위기 속에서도 7~8시간 동안 교암산을 고수함으로써 인접한 아군 병력의 안전한 철수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교암산의 전투 전초진지인 ‘가’고지전투는 약 3시간 동안에 87,000발의 포격을 받으면서도 1개 중대가 적 1개 연대를 상대로 8시간이나 진지를 사수하고 적 1,20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둔 치열한 방어 전투였다. 지리적인 악조건과 인접부대의 방어선이 와해된 상황에서도 진지를 사수함으로써 아군의 안전한 철수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고, 이는 화천 방향으로 철수한 아군 병력이 전열을 재정비한 후 반격을 감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중공군 제199사단 주력 연대의 파상공격을 맞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일진일퇴의 혈전을 벌이다 전사한 김교수 대위의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1953년 10월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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