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
김경천(金擎天) 독립운동가
The Independence Activist Kim Gyeong-cheon
(1888. 6. 5 ~ 1942. 1. 2)
김경천의 본명은 김광서(金光瑞)로 1888년 6월 5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부친은 김정우(金鼎禹)와 어머니 윤옥연(尹玉蓮) 사이에서 5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09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하여, 1911년 수석 졸업한 김경천은 소위 임관을 거부하였다가 조선총독부에 소환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김경천은 일본군 장교로 얻게 되는 군사기밀을 추후 독립투쟁에 써야겠다고 다짐한 후 장교생활을 시작하였다. 1919년 동경에서 2ㆍ8독립선언이 일어나자 민족적 책무를 자각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그 해 6월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또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의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이후 대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 구입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으나, 일본군의 조선인 감시 강화로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에 김경천은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당시 일본의 조정을 받는 중국계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수청지역의 한인들의 피해가 커가자 수청지역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마적 소탕을 하였다.
1921년 초에는 수청 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면서 마적을 퇴치하고 같은 해 10월에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수청에 주둔한 백군을 공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1922년 1월 이만에서 백군과 전투를 벌여 이만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10월에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의 동부사령관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적군은 지금까지의 동맹군이었던 한인 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이에 상해(上海)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재기를 모색하면서 1923년 2월 군사담당위원으로 상해 국민대표회의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이후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근무했다.
1937년 스탈린정권 하에 강제 이주 정책에 반발하였다가 간첩죄로 체포되었고, 1941년 독소전쟁 발발 이후 시베리아로 이감되어 1942년 1월 꼬미자치소비에트공화국의 유배지에서 심장질환으로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항일투쟁을 높이 평가하여 1998년에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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