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찬 중장
김두찬 해병중장은 1919년 3월 8일 평안남도 강동에서 출생하였다. 숭실중학교를 거쳐 명치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던 수재이면서도 1936년 일제의 황민화정책 가운데 하나로 실시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구류처분을 받는 등 항일의식이 남달랐다. 명치대학 2학년 시절, 황해도에 있는 일본인제련소로서 일본군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겸이포제철소의 용광로 폭파 계획을 세우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를 정도로 남다른 민족애와 투철한 투쟁정신을 실천에 옮기는 올곧은 성품이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시절에 통위부 참위(소위)로 임관했으나 부임받은 경리직으로는 그의 군인정신을 맘껏 펼칠 수 없어 관직을 반납하고 육군사관학교 1기로 입교하여 과정 이수 도중 해군에 전입하였다.
6?25전쟁 발발 후 김성은 중장은 해병대 지휘관으로서 영덕, 영월, 홍천지구 전투 등에서 소중한 전과를 올렸으며 중공군의 개입 이후 열세로 돌아선 전황을 타개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했던 서해도서작전을 통해 동?서해안에서 적의 접근을 완벽히 봉쇄하였다. 도서작전은 서해 석도에 대대본부를 두고 초도를 확보하는 한편, 백령도?연평도에 각각 상륙하여 경비 및 기습상륙 등을 전개하는 작전이었다. 아울러 동해의 원산만 전면의 9개 도서를 점령?확보함으로써 동서 해안에서 적의 모급물자와 병력이동에 대한 봉쇄작전을 수행하였다.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간과되었던 해안지역의 중요성을 간파한 김두찬 해병중장의 혜안이 빛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김두찬 중장은 전후에도 교육단장, 사단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해병대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위관급 이하의 행정 실무장병 양성, 문화영화 ‘해병의 하루’ 제작, 산악훈련장 개설, 행정백서 편찬, 명예해병증의 수여 등은 부대발전에 만전을 기했던 김두찬 중장의 업무수행능력을 잘 말해주는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어린시절부터 고전 연구를 비롯한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국제대학, 단국대 등을 거치며 문학박사를 수여했으며 특히 고려 ??남명집??을 심도 깊게 연구하여 한글 창제 이전의 우리말의 실상을 추출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주어진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늘 자신을 둘러싼 한계들에 도전하며 그는 전투지휘관으로서, 부대의 장으로서, 학자로서 항상 치열하였다. 그러한 결실이 1952년 금성을지 무공훈장으로부터 1953년 금성충무 무공훈장(2회), 1956년 미 동성훈장, 1959년 국방부장관 표창의 수여, 그리고 뛰어난 학문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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