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을 전후하여 급격한 인구변동을 겪었던 제주도는 1940년대 후반 콜레라 발병과 극심한 흉년, 군정관리 및 경찰들의 부정부패 등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되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극심한 좌우대립이 지속되는 가운데 UN에서 ‘5ㆍ10 총선거’가 결의되면서 제주도의 남로당 세력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를 기반으로 ‘친일파 처단 조국의 통일 독립’이라는 미명하에 정부를 상대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미군정의 초기대응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놓이던 제주도 4?3사건이 정부수립 이후에도 완전히 진압되지 않자 정부는 육군 14연대를 창설하는 등 경찰과 군병력을 인근 지역에 지속적으로 투입하여 정부의 정통성을 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제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연대 내 남로당 세력은 10월 19일 저녁 8시를 기해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해군은 함정 3~4척을 제주 근해에 배치해 육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특히 JMS 302정(통영정)은 제주 남방 해역을 경비하던 중 맥아더라인을 침범한 일본 어선 2척을 나포해 여수세관에 인계하기 위해 10월 19일 여수항에 입항해 있었다. 이미 경찰서 등 치안관서가 반란군에게 접수된 데다가 여수에 입항한 302함의 승조원들이 모두 외출한 상태에서 이를 최초로 발견한 정장 공정식 대위가 해군본부에 급히 상황을 타전하였다. 이에 해군제독 손원일의 지시로 1948년 10월 21일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석기찬 소위는 JMS-302정의 기관장 겸 갑판장으로서 10월 22일 아침 국군 제5연대 1대대 병력을 LST(상륙함)편으로 여수까지 이동하여 남항부두에 무사히 상륙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호위 통제하던 중, 10월 27일 반란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는 공식 기록으로서 한국 해군의 첫 번째 전사자였다. 석기찬 소위의 투철한 책임감과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으로 국군이 조기에 여수지역을 점령할 수 있게 하였으며 반란군의 양민학살을 방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국가는 그에게 병조장에서 소위로 2계급 특진을 부여하였다.
석기찬 소위는 1927년 10월 7일 인천시에서 출생하였다. 반란군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영웅인 석기찬 소위의 다른 행적이 알려지지 않는 점은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22살 꽃다운 생명을 나라에 바친 그의 정신만큼은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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