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호국인물
오광선(吳光鮮) 독립운동가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Oh, Gwang-seon
(1896. 5. 14 ~ 1967. 5. 3)
본관은 해주. 초명은 성묵(性默). 1896년 5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죽릉리에서 항일의병에 참전한 의병장 오인수 선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향리에서 삼악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가 종로의 상동 청년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15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한 후 ‘조선의 광복을 되찾겠다’는 뜻의 광선(光鮮)으로 이름을 바꿨다. 선생은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군사훈련을 받기위해 중국의 명문사관학교인 보정(保定)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3개월간 폭탄 제조법 등 특수훈련을 받았으나 중국의 내전으로 아쉽게도 학업을 중단하였다. 이후 만주로 넘어가 독립군 간성을 양성하였던 합니하(哈泥河)의 신흥무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로군정서 제1대대 제1중대장과 3중대장에 이어 제1대대장을 맡아 각종 전투에 참전하였다.
청산리전투 이후 1920년 12월 만주의 각 독립군 부대가 통합되어 대한독립군단으로 재발족되자, 중대장을 맡아 명지휘관으로서 독립전쟁을 전개해나갔다. 선생은 한때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와해당하고 러시아 군 형무소에 특별 수감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비하여 한국독립군이 결성되자 의용군 중대장으로서 항일무장투쟁을 부단히 이어갔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에 대항하여 한·중 연합군이 결성되자, 총사령관 지청천 등과 함께 1933년 7월초 수분하(綏芬河) 대전자(大甸子)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두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전투가 오늘날 독립전쟁 3대 대첩 가운데 하나로 불리는 대전자령전투다.
1933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광복군 중추장교를 양성할 책임자로서 20여 년간 피흘려 항쟁하던 만주를 뒤로하고 산해관을 넘어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1934년 2월 중국 낙양군관학교 내 한국독립군을 위한 특별반이 설치되자, 교관으로 초빙되어 광복군 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1936년에는 만주에서의 독립군 기지 재건을 목적으로 북경에 파견되어 비밀공작대를 조직하는 한편, 일본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도이하라 겐지(土肥原 賢仁) 중장의 암살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국내에 침투한 다른 공작원이 체포됨에 따라 근거지가 노출되면서 오광선 선생도 1937년 1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40년 11월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광복군 국내지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설치하는 한편 새로운 나라에 중추적 역할을 할 사관생도 양성을 위한 ‘대한무관학교’ 설립에 힘을 기울였다. 1948년 정부 수립이후에는 한국 군대 창건에 투신하여, 육군사관학교 제8기 고등장교 특별훈련반을 수료한 후 대령으로 임관하였다. 그후 호국군 100여단장에 이어 서울지구 병사구사령관, 국방부 국회연락장교 등을 역임하였다.
6ㆍ25전쟁 기간에는 강원도 병사구사령관과 계엄민사부장에 이어 충남지구 및 제주도지구 병사구사령관, 육군 근무군단 부군단장 등에 복무하였다. 전후에는 대전지구 위수사령관과 전북지구 병사구사령관 등에 복무한 후, 1956년 7월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선생은 1967년 5월 향년 73세를 일기로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단칸 셋방에서 쓸쓸히 작고하셨다. 현재 선생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묘비번호 36에 안장되어있다.
오광선 선생의 일가는 선생 본인뿐 아니라 의병활동을 펼친 선친 오인수 의병장를 비롯해 부인, 자녀와 사위까지 가족 모두 독립운동 일선에 뛰어들은 3대 독립운동 가문이다. 의병에서부터 독립군, 광복군까지 40여 년간 일가족 모두 항일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은 세계 역사상 매우 드문 일이다. 3대에 걸친 독립투쟁과 건군활동은 우리 후손들에게 올바른 위인상으로 영원히 귀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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