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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5년 1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5-04-10 조회수 6774
파일첨부 monthlyP_2015012922241956.jpg

1월의 호국인물

이익수(李益秀) 육군준장

BG. Lee, Ik-soo

(1923. 10. 7 ~ 1968. 1. 24)



이익수 육군준장은 1923년 10월 7일 충남 부여군 옥산면 대덕리에서 이현만(李賢萬) 선생의 6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천의 판교국민학교와 공주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상경하여 1943년 경성법정학교 경제과를 졸업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예비군인 호국군(護國軍)에 들어가 소위로 임관하여 대전에 있었던 호국군 사령부에서 작전참모로 근무하면서 건군활동에 참여하였다. 1949년 8월 6일 병역법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호국군이 해체되자, 현역으로 입대하여 1949년 10월 17일 대전병사부 사령부에서 예현 2기(예비역에서 현역으로 전환)로 소위 임관한 뒤 1949년 12월 31일 2사단 25연대 9중대 소대장이 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10월 25일 11사단(화랑부대) 20연대 5중대장으로 참전하여, 공비토벌작전 등에서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후 1951년 2월 15일 11사단 13연대 3중대장이 되어 1951년 6월 14일과 19일에 소작봉 전투와 600고지 전투 등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훈을 인정받아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으로부터 직접 미 은성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 2회(1951ㆍ1952년), 충무무공훈장(1954년) 등을 수여받았다. 이후에도 일선 중대장으로 여러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전쟁기간 내내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전쟁 후에는 수사사령부 감찰부장과 육군본부 감찰감실 조사계장 및 강원병무청장 등을 역임한 후 1967년 7월 21일 1사단 15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정찰국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의 임무를 띠고 세검정 지역으로 침투한 1ㆍ21사태가 발생하였다. 북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아군 병력에 그 움직임이 포착되어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익수 대령이 지휘하는 1사단 15연대도 이 작전에 즉각 투입되어 무장공비들의 도주로 차단 및 격멸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1월 24일 오전 7시 57분경 무장공비 소탕작전은 중대한 국면을 맞게 되는데 이익수 대령의 15연대가 양주군 광적면 노고산에 침투한 무장공비 3명을 발견한 것이다.

이에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은 즉각 연대 수색중대를 투입하는 한편 다른 병력으로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노고산 일대를 완전무결하게 포위했다. 그리고 이 포위망을 압축하면서 무장공비 수색작전을 펴나갔다.

그러던 8시 40분경 15연대는 북노고산 동북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도주하던 공비와 조우하여 사격전을 벌여 1명을 사살하였으며 나머지 2명을 생포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다. 그러자 공비들은 근처에 구축되어 있던 교통호로 은신하고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완강히 저항해 왔다. 이에 이익수 대령은 적 은신처 20여 미터까지 접근하여 직접 귀순을 권고하였으나 적 공비는 이에 불응하고 강력히 저항하였다.

거듭되는 귀순 권유가 수포로 돌아가자 이익수 대령은 적을 사살하기로 결정하고 직접 수류탄을 투척하려 하였다. 그 순간 무장공비는 소총을 난사하여 안타깝게도 이익수 대령은 적의 흉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연대장의 전사소식을 전해들은 부대원들은 필사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2명의 공비를 모두 사살하였다. 이익수 대령 외에도 1?21사태로 35명의 생명이 안타깝게 희생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기리고자 1968년 1월 29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고, 동시에 육군준장으로 1계급 특진시켰다. 아울러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한 3부요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북한특공대소탕작전 전사장병 합동장례식을 거행하였다. 현재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묘역 묘비번호 21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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