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3년 4월의 호국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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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산부 | 등록일 | 2013-04-05 | 조회수 | 1948 |
파일첨부 | monthlyp_2013040416245627.jpg | ||||
이순신(李舜臣) 장군 (1545 ~ 1598) 이순신 장군은 1545년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1576년(선조 9) 32세 때,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권지훈련원봉사(權智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발포수군만호, 훈련원참군, 사복시주부, 조산보만호 등을 역임했고, 1589년 선전관과 정읍현감 등을 거쳐 1591년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좌수영에 부임한 장군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평소 구상했던 거북선을 만들어 시험하는 등 군비확충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듬해인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왜선 30척을 격파했다.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했다. 이어 당포,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해전에서 연전연승하며 170여 척의 왜선을 무찌르고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했다. 1593년 한산도로 진영을 옮기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장군은 강화회담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둔전개발 등으로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군량을 비축하는데 힘썼다. 1597년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물러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으나, 장군은 왜군의 간계와 원균의 모함으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위를 원균에게 내주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죽음 직전에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장군은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로 들어가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후임 원균이 칠천량에서 왜군에게 참패하고 전사하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장군은 겨우 남은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도 명량 앞바다에서 133척의 적과 맞서 싸워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회복했다. 그러나 전쟁의 막바지인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왜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적의 유탄을 맞고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고, 휘하 장수들은 장군의 뜻을 받들어 분전하여 적을 대파했다. 1604년(선조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서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해진데 이어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가 후에 영의정이 더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