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9월의 호국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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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산부 | 등록일 | 2003-09-01 | 조회수 | 3477 |
파일첨부 | kp2030826o0709.jpg | ||||
허위 [ 許蔿 , 1854.4.1~1908.9.27 ] 본관 김해(金海). 호 왕산(旺山). 1854년 4월 1일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출생하였다. 허 의병장은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1896년 이은찬(李殷瓚)·조동호(趙東鎬) 등과 의병을 일으켜 김천(金泉) 장날을 기하여 수백 명을 모집, 성주(星州)에 포진하였다. 그러나 협공하는 관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이은찬·조동호가 전사하자 다시 의병을 이끌고 진천(鎭川)에 이르렀을 때 고종으로부터 의병 해산령이 내려져 자진 해산하고 귀향한 뒤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1899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영희전(永禧殿) 참봉·성균관(成均館) 박사 등에 임명되었다가 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거의(擧義)명령을 받고 포천(抱川)·양주(楊州)·연천(漣川)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수차례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양주(楊州)에서 의병대장들의 모임을 열고 이인영(李麟榮)을 원수부 13도의병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군사장(軍師長)이 되어 일거에 서울에 진입, 의병 2,0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대치,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퇴군하였다. 그 후 이완용(李完用)이 연천 진지로 사람을 보내 경상도 관찰사·내무대신 등의 관직으로 유인하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1908년 6월 11일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고 경기도 영평(永平)에서 체포되었다. 그 해 10월 옥중에서 사형당할 때 옥관이 유언의 유무를 물으니 "대의를 펴지 못하였는데 유언은 무엇에 쓰랴"하며 도리어 옥관을 꾸짖고 5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허의 의병장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