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2년 3월의 호국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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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산부 | 등록일 | 2012-03-05 | 조회수 | 1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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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은 일제 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을 하다가 순국한 최시흥(崔時興) 독립운동가를 2012년 3월의 호국인물로 선정, 발표했다. 최시흥 선생은 1889년 평안북도 의주 출생으로 삭주(朔州)에서 마부(馬夫)로 있다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500여 명의 의혈청년을 규합하여 평안북도 의주·삭주·구성 3군의 경계를 이루는 험준고산인 천마산을 근거로 천마산대(天摩山隊)를 조직, 총대장격인 사령장으로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선생이 이끄는 천마산대는 군자금 모집, 의주·삭주·구성·창성 일대 14개의 경찰관 주재소와 관청 파괴, 악질순사 처단 등을 맹렬히 전개하여 서북지방 의열투쟁의 드높은 기세를 대변했다. 1920년 8월 대한광복군사령부가 설립되었을 때 선생은 광복군총영에 합류하여 제4영장으로 임명되었고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3중대장으로 편제되어 계속해서 항일 무장투쟁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군 대부대의 공격을 받는 등 일경의 포위가 좁혀지자 선생은 1922년 대원들을 안전하게 만주로 이동시키고 뒤이어 만주로 가던 도중 봉천성(奉天省) 임강현(臨江縣)에서 중국 관헌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백방으로 신병인도를 요구했으나 중국측에서 응하지 않자 계략을 꾸며 선생을 석방케 한 후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했다. 법정에서도 재판관을 준엄하게 질타하는 등 기개를 굽히지 않던 선생은 결국 1924년 11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이듬해 3월 12일 평양형무소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12년 3월 8일(목 14:00)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유관단체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