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1년 5월의 호국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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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전산부 | 등록일 | 2011-06-02 | 조회수 | 2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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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평안북도 정주군 옥천면에서 태어난 선생은 19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이 일제의 무력으로 좌절되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상해의 임시정부에 광복군총영(총영장 오동진)이 설치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1920년 8월에 미국 상하의원들로 구성된 동양시찰단 일행의 서울 방문시, 이를 기회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열망과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선생은 8월 15일 비밀리에 입국하여 신의주의 호텔에 폭탄을 투척하였고, 이후 만주 지역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고 밀정을 처단하는 등의 맹렬한 무장 항일투쟁에 전력했다. 1924년 11월 정부의 성격을 띤 정의부가 조직되자 제5중대에 배속되어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경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이후로도 숱하게 국내에 침투하여 정주와 귀성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경을 살상하는 등 수 년 간 일본 경찰을 괴롭혔다. 1931년에는 노농자위군(이후 재만조선인혁명군으로 개칭)을 조직하여 대장에 올랐다. 그러나 국내에 자주 진입하여 활발한 투쟁을 하였기에 일경의 집중 체포대상이 되었고, 결국 1932년 2월 안동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악형 끝에 1933년 6월 2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5월 18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은 작은 체구로 신출귀몰하는 대담한 활동을 벌여 수호지에 나오는 흑선풍(黑旋風)과 같다고 하여 ‘만주의 흑선풍'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애꾸눈이었기에 '일목장군(一目將軍)'으로도 불렸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