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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복 / 연세대 교수 |
연전에 몇몇 지인들과 당시(唐詩) 서예전을 연 일이 있다. 당시 서예전은 두보(杜甫)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왕유(王維) 등 자기가 좋아하는 당나라 시인들의 시를 암송해서 쓰는 글씨 전시회다. 글씨의 조형미보다는 시적 감흥과 흥취로 쓰는 일종의 시서전(詩書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만큼 오자(誤字)도 있고, 파자(破字) 탈자(脫字)도 더러 나오는 좀 별난 서예전이다.
이 서예전 첫날, 관람하러 온 70세가 좀 넘어 보이는 노인 세 분이 내 글씨를 보고는, 그 중 한 노인이 옆의 노인에게 “자네 지금부터 써도 이만큼은 쓸 수 있네”라고 했다. 그 노인들 뒤에 서 있던 나는 속으로 ‘여보 노인네들, 죽을 때까지 써 보시오. 그 글씨처럼 되는가’ 하며 웃었다. 글씨란 써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떤 글씨도 대수롭잖게 보인다. 그래서 그것도 글씨라고 썼는가 하고 핀잔도 쉽게 한다. 그러나 글씨를 종평생(終平生) 쓰는 사람들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그림은 10년을 그리면 일가(一家)를 이루는데, 글씨는 10년을 써도 이제 겨우 시작이다.” 그만큼 글씨는 어렵다는 것이다.
처음 서예에 입문하는 사람에게 한일자(一字)를 경부고속도로 길이만큼 써 보라 하는 선생이 많다. 한일자 길이를 10㎝나 5㎝로 하면 1㎞만 해도 1만번에서 2만번을 그어야 한다. 경부고속도로를 450㎞라 하면 10㎝ 길이로는 450만번, 5㎝ 길이로는 900만번을 그어봐야 중봉(中鋒)을 제대로 내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글씨를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정력 소모고, 엄청난 시간 낭비다. 그러나 신자불과습자지문야(神者不過習者之門也)라는 말처럼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려면 그 같은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연습(練習)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 글씨뿐이랴.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광화문 현판글씨를 두고 설왕설래 하더니 드디어 다른 것으로 바꾼다고 한다. 처음 정조 임금의 글씨 집자(集字)가 거론되더니 지금은 원래 현판글씨의 디지털 복원으로 결정되었다는 보도다. 집자든 디지털 복원이든, 이 모두 글씨 문외한들이나 할 수 있는 발상이다. 먹이라고는 한 번도 갈아본 일도 없고, 글씨라고는 더더욱 수업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겨우 생각해 낼 수 있는 수준일 뿐이다.
글씨란 집자를 하거나 디지털 복원을 하면 그 순간 죽어버린다. 더구나 현판으로 내걸면 완전히 사문(死文) 사자(死字)가 된다. 글씨는 집자 발상에서처럼 한자 한자씩 쓰는 것이 아니라 단어나 글귀(句)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글자 간 핏줄이 흐르고 맥이 뛰어서 ‘광화문’ 세 글자가 실은 세 글자가 아니라 한 글자가 된다. 집자를 하면 그 글자들이 각기 다르게 글자들이 쓰여진 만큼 글자 사이에 피가 흐를 수 없고 맥이 뛸 수 없다. 마치 혈맥이 끊어진 인체처럼 글자도 죽고 글귀도 죽는 것이다. 더구나 디지털 복원을 하면 글자도 글귀도 혼이 없어진다. 기도 죽고 호흡도 끊겨서 마치 시신(屍身)을 내세워 분장한 것이나 다름없이 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광화문 현판 글씨는 누가 봐도 기세가 대단하다. 도대체 저 기운, 저 기백, 저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글씨가 웅지를 머금고 살아서 뻗치는 것 같다. 그건 분명 대통령 한 개인의 에너지가 아니라 당시 국민 전체의 에너지일 것이다. 60년대 말 70~80년대, 우리가 세계 170여국, 그 어느 나라든 구석마다 다 누빌 수 있었던 것도 그 에너지, 그 기세 때문이 아닐까. 오늘날의 글로벌라이제이션도 거기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 현판이 이제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지려 한다. 우리 문화재 위원들이 죽은 글자와 산 글자를 구분 못 하는 청맹과니는 아닐 것이다. 아예 청맹과니거든 현판 없는 문으로 남겨두라. 그것이 차라리 윤봉길 의사 사당의 현판을 도끼로 가르는 야만보다는 훨씬 낫다. 수도 한가운데 시신처럼 죽은 글자를 걸어 놓고 매일 쳐다보게 하는 것만큼 몸 떨리는 일이 또 있겠는가.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