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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고문] 국난 극복의 제주 역사 / 제주도회장 김달수
등록자 제주안보부장
등록일 2023-02-08 오후 4:41:56 조회수 5455

국난 극복의 제주 역사[제민일보 23. 1.25. 발췌]

우리 민족사에서 6·25전쟁은 말로 하기 힘든 동족상잔의 비극의 시기였다. 이러한 국난의 시기 제주 사람들이 살아온 행적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치열하게 일궈낸 국난 극복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19506·25전쟁 당시 모슬포, 대정, 서귀포 일대는 바람 앞의 등불이던 우리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정예 장병을 훈련시켜 전쟁터로 보내는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이는 제주도 사회, 경제,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507월 중순 1만여 명의 피난민이 제주항, 성산항, 화순항, 한림항으로 대거 입도하여 공공시설과 민가에 분산되면서 전시 속에 술렁대던 은둔의 섬 제주도에 생활양식이 다른 육지 문물이 거센 물결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19511·4후퇴 직후에는 인구가 79천여 명 증가하고, 1951년 말에 이르러 토착인구의 60%와 맞먹는 14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입도하여 제주도 고유의 향토문화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순수예술과 체육, 교육, 종교, 교육 분야에서 큰 발전을 가져왔고 지역 경제 발전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4·3에 이은 6·25전쟁 당시 제주인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폐허 속에서 신음했다. 피난민의 대거 입도는 식량난, 주거난과 치안 불안은 물론 제주도민의 생활방식을 비하하는 등 감정적인 충돌로 이어져 사회 문제들도 많이 발생했으나, 제주인들은 조냥정신을 실천하며, 이들을 품고 연민을 베풀었다.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궁핍 속에서도 부족한 양식으로 주먹밥을 제공했고 거처가 없어 방황하는 사람을 보면 집으로 안내하여 한식구처럼 따뜻한 정을 베풀었다. 원주민과 피난민과의 대립 관계는 난국을 극복하는 정겨운 동포애로 승화돼 갔다. 피난민들의 활동은 휴전 이후 복귀할 때까지 짧은 기간이었으나 제주도민들이 순수예술에 대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고, 제주 예술인들은 피난민들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정보와 자극을 얻어 제주도 음악, 연극, 미술계의 진로를 개척할 안목을 키우게 됐다.

 

육군 제1훈련소(에 조직된) 연예대에는 극작가 유호와 임인수, 신카나리아, 황해, 구봉서, 양석천, 양훈 등 일류 가수들과 배우들이 도민들의 대단한 인기를 모았으며 '삼다도 소식'이 가수 황금심에 의해 인성리 마을회관 옆 가설무대에서 발표되었고, 같은 시기에 '전우여 잘 자라'가 대정에서 발표됐다.

 

이중섭, 장리석, 김창열, 최영림, 홍종명 등에 의해 현대미술의 싸앗이 뿌려졌으며, 피난문인 계용묵, 장수철 등에 의해 제주문학이 태동되었다. 이외에도 체육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제주도에 배구, 농구, 태권도, 핸드볼, 야구, 기계체조 등 다양한 종목이 보급돼 활기있게 행해졌고 또 전국규모의 대회에도 출전하여 제주도 체육발전에 기둥 역할을 했다. 또한, 교육재건운동에 앞장서 문맹 퇴치운동을 벌이는 등 교육 난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 제주인과 피난민의 관계는 제주의 역사이자 역경을 이겨내는 삶의 과정이었다. 국난을 슬기와 지혜, 조냥정신으로 이겨내며 살아왔던 제주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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