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혁명과 학살(虐殺)
Causewitz 와 Karl Marx의 전쟁.
제2차대전이 끝나고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의로 양분되어 주도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
클라우제비치가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며 폭력으로 상대의 의지를 말살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 것을 칼 맑스(Karl Marx)는 "전쟁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이를 강화하고 확대하기 위하여 행해지는 사회집단 상호간의 무력투쟁이다."라고 정의했다.
아울러 계급투쟁에서는 "역사는 유일하게 항구적인 투쟁만이 존재하는데 그 투쟁이란 바로 가난한 자가 있는 자 부자에 대한 투쟁"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이를 성실히 수행하면 사회혁명이 일어나고 이것이 전쟁으로 발전한다고 정의를 내렸으며, 이 공산주의 이론은 2차대전 이후 전세계가 이념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Russia에서는
스타린이 정권을 잡고난 후 혁명의 방해요소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처형을 단행했다. 전쟁영웅이며 소련군 건설의 일등공신인 두하체프스키 원수 이하 8명의 장군을 나치와 손잡고 스타린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꾀했다는 죄로 처형했다. 1936년 5.000명이 넘는 장교가 처형되었다. 5명의 원수 중에 3명을, 15명의 군사령관 중 13명을, 85명의 군단장 중 57명을, 195명의 사단장 중 110명을, 406명의 여단장 중에서 220명을 처형했다.
소련은 혁명 후 지식인 귀족 군장성의 저항이 있었으나 히틀러는 1941년 6월 바바로사(Barbarossa)계획으로 소련을 침공하자 오히려 혁명의 완성을 도와준 셈이 되었다. 스타린은 혁명의 방해가 되는 사람을 선별하여 애국이라는 명분으로 전선에 투입하여 자연스럽게 제거했다. 1941년 모스코바 전방 단일 전투에서 400만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전쟁 기간 중 군인 750만명이 전사, 1400만명이 부상하였고, 민간인 1500만명이 사망하였다. 이 때 지식인을 비롯한 혁명에 방해가 되는 대상을 전선에 투입하여 자연스럽게 제거했다.
중국에서는
장 개석 총통이 대만으로 탈출한 후, 남아 있는 국부군 출신이 혁명의 방해요소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항미성전이라는 명분으로 국부군 출신 20만을 한국전쟁에 투입하였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을 택하여 연합군의 화망속으로 사람으로 바다를 이루어 공격하여 다 죽게했다. 자연스럽게 제거했다.
그후 모 택동은 홍위병의 문화혁명을 일으켜 혁명의 적대세력인 지식인과 모 택동이 위협을 느끼는 인사를 10대와 20대 초반의 공산주의 맹신자를 동원하여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폭력과 체형 및 학대행위를 자행하고 비참하게 참살했다. 해를 입은 인사가 수천만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전쟁시에는
김 일성은 6. 25 전쟁시 남한청년 40만을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징집하여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였다. 혁명의 저해요소를 사전에 제거하자는 저의가 포함되어 있다. 기존질서를 파괴하기 위하여 인민재판을 통해 많은 사람이 학살되었다. 민간인 사망이 244.633명, 학살을 당한 사람이 128.968명, 납치가 84.532명, 행방불명이 393.212명이 발생했다.
캄보디아는
1975년부터 5년간 중국의 지원을 받던 폴포트(POL POT)에 의해서 자행된 대학살 Killing Field는 인구 1.000만에서 인구의 1/4인 시민 250여만을 배웠다는 이유 하나로 학살했다.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지식인 자본가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대학살이다. 가난한 자가 있는 자에 대한 철저한 보복이다. 대학을 문 닫고 토지대장을 태우고 책을 불질렀다. 지금은 선생이 없고 나라를 이끌 지도자가 없으며 세계의 최빈국이 되었다.
월남은
공산화된 이후 지식인과 공무원 및 종교인등은 재교육을 받았다.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었고 배신자로 간주되어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공무원은 제국주의 앞잡이로, 군인은 무력으로 대항했기 때문에, 문예인은 민족정신을 교란한 사람으로, 종교인은 국민을 유혹하고 미신에 빠지게 한 사람으로, 자본가는 국민을 착취한 사람으로 죄를 물어 재교육을 시켰다. 그 수가 30만에서 100만으로 추정한다. 육군 중위 정도가 4년을 살다 나왔다.
각 성(省)별로 수용소가 설치되어 한 곳에 2.000명 정도 수용하여 주로 밀림지역에서 말라리아 등 풍토병에 노출된 채로 월 9kg의 식량지원으로 자급자족의 생활을 했다. 면회가 없고 체형과 학대가 자행되고 가혹한 육체노동을 강요하고 의무지원이 없었음으로 영양실조와 병으로 자연스럽게 병들어 죽게 하여 제거했다.
끝으로
북의 대남혁명전략은 변한 것이 없다. 남북이 대화를 하여 전쟁을 예방하고 장차 평화적인 통일을 추구하자는 우리의 노력에 성공이 있기를 바라면서, 북의 공산혁명의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공산 혁명(革命)과 학살(虐殺)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따라 통일을 해야 한다. 자칫 북의 공작에 속아 통일이 되는 경우,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경계해야 한다.
1. Karl Marx의 전쟁.
클라우제비츠(Clausewitz)는 "전쟁은 정치의 연속(連續)이며 또 다른 수단이고, 폭력에 의해서 싸우려는 상대의 의지를 말살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칼 막스(Karl Marx)는 "전쟁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이를 강화하며 확대하기 위하여 행해지는 사회집단 상호간의 무력투쟁이다."라고 정의했다. 즉 생산수단의 소유(所有)를 위한 수단과 방법 및 행위가 전쟁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즉 수단과 방법 및 행위는 혁명(革命)과 침략을 의미한다.
아울러 그의 주장은 계급투쟁에서는 "역사에는 유일하게 항구적인 투쟁만이 존재하는데, 그 투쟁이란 바로 가난한 자가 있는 자 부자(富者)에 대한 투쟁"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이를 성실히 수행하면 사회혁명이 일어나고 이것이 전쟁(戰爭)으로 발전한다."라고 정의를 내렸다.
Marx의 이론을 바탕으로 Russia혁명이 일어났고, 공산 Russia가 탄생한 이후 Marx주의는 "자본주의(資本主義) 발전과정에서 일어나는 전쟁에는 반대(反對)하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해방전쟁에는 찬성(贊成)한다."라고 전쟁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였다.
이 공산주의 이론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여 2차대전 이후 전세계가 이념(Ideology)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의 6.25 전쟁, 월남전쟁, 캄보디아의 폴 포드(POLPOT)에 의한 학살이다.
2. 월남의 공산화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월남은 공산화된 이후 지식인, 공무원, 군인, 종교인, 부유층, 그리고 월남정부에 협조한 사람들은 전부 재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적대(敵對)계층으로 분류되었으며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로 간주되어 승자의 보복대상이 되었다.
탄압과 차별 ,학대와 폭정이 자행되었고 전국 각처에 재교육 수용소가 설치되어 적대계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잡아 가두고 공안경찰을 증원(增員)하여 국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것을 통제했다.
가혹한 육체노동을 강요하였다. 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규정하여 "부모의 흘린 피와 땀, 자식이 흘린 피와 땀이 합쳐야 나라가 번영한다."고 선전하면서 무자비(無慈悲)한 노동을 강요했다.
논과 밭은 국유화되고 영농은 철저한 3모작을, 일반 국민은 헌금을 강요받았으며 돈이 없는 자는 노력봉사를 해야만 했다.
노동자는 한달에 15kg의 쌀을 배급받아 생활해야 했고, 전쟁부채 상환비, 전비(戰費)기금을 내야 했다. 먹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고 수중에 돈이 없게 하여 국민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철저한 국민재교육을 시행하였다.
또한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종래 부를 축척한 모든 것을 부정하여 자살을 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이 국민 재교육은 공무원(公務員)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경찰(警察) 및 정보요원은 제국주의의 도구(道具)로, 군인(軍人)은 무력으로 총을 가지고 대항했던 사람으로, 문예(文藝)인은 민족정신을 교란시킨 사람으로, 종교인(宗敎人)은 국민을 유혹하여 미신에 빠지게 하고 우매하게 만든 사람으로, 자본가(資本家)는 국민을 착취하여 강압적 노동을 시켜서 반혁명에 앞장을 섰으며 국민에게 피의 부채를 지고 있다. 라는 죄를 물어 재교육을 시켰다.
"우리 공산당은 이 반역자들을 재교육 과정을 통해서 사회주의 혁명에 동참할 선량한 국민으로 개조하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선도할 것이며 노동을 경험하게 하여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길을 열어준다."라고 선전했다.
한 수용소에 2.000명 정도 수용하였으며 성(省) 별로 1개 이상이 있고 사이공 주변 등 도시 주변에는 대상자가 많음으로 여러 곳에 설치하였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밀림지대에 위치하여 탈출을 방지하고, 나무를 벌목하여 수용소를 짓고 개간하면서 식량은 월 9kg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자급자족하도록 했다.
수용소 방침 자체가 체형(體刑) 및 학대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작업 실적에 따라서 수용소장의 재량으로 급식의 양을 결정하였다. 따라서 제거해 버리고 싶은 적대계층의 사람은 굳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더라도 제거할 수 있게 제도를 만들었다. 가족이나 다른 국민들, 외국(外國)의 항의를 벗어나기 위한 교묘한 방법을 강구해 냈다.
수용소 기간에는 면회가 일체 사절되었고, 편지도 1년 또는 2년에 한번 보낼 수 있었으며 의료혜택은 전무하여 병에 걸리면 바로 죽는 것이었다. 말라리아 등의 열병과 뱀 전갈의 독충과 영양실조 및 미래에 대한 포기는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혁명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했다. 즉결처분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그 인원은 30만에서 2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확한 통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월남군인만 100만이 넘는 것을 감안할 때, 하사관 및 초급장교까지 수용소로 보냈으며 공무원 종교인 경제인 월남 정부 협조자와 그 가족까지를 포함하면 최소한 100만 명 이상의 상당한 숫자가 재교육을 받았다고 판단된다.
사이공 경찰에 소속 보도요원의 중위로 근무했던 구엔 반 호이(Nguen Van Hoi)는 1975년 6월부터 1979년 1월까지 수용소 생활을 하고난 후, 1985년 8월에 해상탈출을 할 때까지의 생활을 지옥으로 표현했다.
자유 월남 시절 사이공 대학생이었다가 1985년 탈출한 리우 딩 중(Lieu Dinh Dung) 학생의 수기 중에는 이런 지적이 있다.
나라를 망친 이유는 행정관료의 부정부패와 정당간의 극한 대립과 정의(正義)로운 사회를 구현하지 못했다. 공산분자에 관용을 베풀고, 처형을 못하고 감옥에 가두어 오히려 보호를 해주고, 반정부 과격데모를 중지시키지 못하여 패망하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때의 심경을 시 한 수로 대신했다.
『멀리서 공산주의를 바라보니
금강석처럼 반짝이기에
무엇인가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보니
그 것은 피로 범벅이 된 눈물이라네.』
) 월남 탈출33인의 수기「나라 잃은 사람들」국방부. pp.33-71
3. Russia 혁명 후에는?
소련은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 귀족 및 군인, 지식인의 저항에 부딪쳐서 국내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Hitler가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켜 1941년 6월 바바로사(Barbarossa)계획에 의하여 소련을 침공함으로서 오히려 스타린으로 하여금 공산혁명의 완성을 결정적으로 도와주었다.
이때 스타린은 혁명에 저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선별하여 애국이라는 명분을 주고 이들을 징집하여 전선(戰線)으로 몰아넣어 전부를 죽게하여 자연스럽게 제거해 버렸다.
Moscow 전투시 1941년 6월 22일에서 11월 말까지 단일 전투에서 400∼500만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에서 제일 먼저 총알받이가 되어 죽은 사람이 바로 혁명의 방해가 되는 Moscow 인사들이었다.
소련은 전체적으로 2차대전시 군인 750만이 전사하였고, 군인부상 1400만, 민간인 사망이 1500만이 발생하였다. 이때 자연스럽게 방해가 되는 계층은 다 제거(除去)했다.
또한 Stalin은 혁명에 방해가 되는 대상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한 처형을 단행하였다. 우리가 알기로 소위 "에조프시치나"라고 불리우는 대처형으로 세계를 경악케했다.
"에조프"를 내무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고 1936년에 시작하여 1939년에 이르기까지 제일 큰 위협인 군대를 제거했다. 1937년 6월 2일에는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영웅(英雄)이며 소련군 건설의 1등 공신인 참모총장 두하체프스키 원수 이하 8명의 장군을 나치와 손잡고 스타린에 대해 음모를 꾀했다는 죄로 처형했다.
군부의 대숙청은 계속되어 5천명이 넘는 고급장교가 처형(處刑)되었다. 이 숙청으로 5명의 원수 중에서 3명, 15명의 군사령관 중에서 13명을, 85명의 군단장 중에서 57명을, 195명의 사단장 중에서 110명을, 406명의 여단장 중에서 220명이 처형되었다. 혁명에 방해가 되는 군부의 고급 장교들을 두하체프스키 원수(元帥)의 죄목에 뒤집어 씌워서 처형해 버렸다.
) 노 병천.「도해세계전사」한 원. 1989. 10. p.302
4. 중국에서는
중국에서는 장개석 군대가 모택동에게 패한 후, 대만으로 탈출을 못하고 본토에 남아 있는 옛날 장개석 총통의 군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공산혁명의 저해요소로서 한국전이 발발하자 이 군인들 20만을 소집하여 한국전에 투입하였다. 어떻게 하면 명분이 있게 다 죽일 수 있을까? 그들이 택한 것이 인해전술(人海戰術)이다.
즉 말 그대로 UN군의 지뢰밭과 화망(火網)지역을 사람으로 바다를 만들어 공격을 하는 전술이다. 혁명의 방해요소인 장개석 군대의 국부군 출신을 항미(抗美)전쟁이라는 구실로 자연스럽게 제거했다.
그후 모 택동은 전 세계가 경악한 홍위병의 문화혁명을 일으켜 공산주의 혁명의 적대세력인 지식층을 10대와 20대 초반의 공산주의 맹신자를 동원하여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제거하였다.
폭력과 체형 및 체벌 학대 행위를 자행하고 대상자를 비참하게 참살하였다. 가난한 자가 지식인과 가진 자에 대한 투쟁은 항구적으로 계속되어야 하며, 이것은 전쟁으로 발전한다는 칼 막스의 계급투쟁 정의를 철저히 이행했다. 이때 피해를 입은 인사가 수천만에 이른다는 정보가 있다.
5. 한국전쟁시에는
김 일성은 6·25전쟁시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될 때 남한 청년 40만 명을 강제로 징집하고, 각 감옥소에 수감되어 있는 우익 반공 죄수들을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낙동강 전선에 대거 투입하였다. 그들은 낙동강만 돌파하면 곧 전쟁이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사전에 혁명에 저해요소가 되는 인사들을 전선에 투입하여 자연스럽게 제거해 버리자는 저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전 기존질서를 파괴하고 공산주의를 심기 위하여 소위 인민재판(人民裁判)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학살을 당했다.
북괴군이 지나 가고 난 후, 후속해 온 치안부대는 각 마을마다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기본 질서를 철저히 파괴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여 불만이 있던 사람들 중에서 공산당에 동조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인민 위원회 위원장, 각종 연맹 위원장에 그들을 임명하였다.
예를 들면 방앗간의 머슴, 이발소의 머리를 감아주던 사람, 경찰 파출소의 소사(심부름 하던 사람)를 전쟁 직전에 월북하도록 하여 충분히 교육을 시킨 후 남파하여, 이들을 앞장 세워 그 고장의 인사들을 찾아내어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제거하도록 했다.
옛 부하가 상관을,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재판하여 총살을 시키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마을에서 학식이 있는 지식인, 존경을 받는 사람, 재산이나 땅이 있는 사람, 평소 반공을 외치던 사람, 경찰, 공무원, 학교 교수나 선생님 등이 지은 죄도 없이 죽어야 했다. 감옥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훗 날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자연스럽게 죽게 만들었다. 탈출하거나 포로가 된 청년들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반공포로 조직을 하여 투쟁하였으며 당시 이 승만 대통령은 이들을 석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민을 통제하고 도망을 못 가게 하기 위하여 밤새도록 쌀과 콩, 밭, 심지어는 좁쌀까지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전부 한알 한알 세어서 숫자를 보고하도록 했다.
필자는 10살의 어린 나이에 포천에서 인민재판을 보았고, 친척이 매 맞아 죽는 것을 보았고, 머슴이 자기 주인을 인민재판을 하면서 삽 자루로 노인네를 패서 죽게 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혁명의 수행이다.
이렇게 비참하게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학살을 당한 인사가 128.968명이고, 어딘가 끌려가서 죽음을 당한 민간인 인사가 393.212명이나 된다. 그리고 북으로 납치된 민간인 인사가 84.532명이고, 전쟁 중에 죽은 민간인이 244.633명이다.25)
공산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본질서를 철저히 파괴해야 한다. 어떻게 기본질서를 파괴하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6.25에서 경험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똑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대남적화통일을 수행하려고 한다. 북의 혁명완수가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실천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에 우리는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하고 이를 직시해야 한다.
필자가 명예 총영사로 있는 캄보디아에서 소위 Killing Field때 폴 포트 정권이 혁명에 저해가 되는 인사를 250만이나 살해했다고 한심한 나라라고 흉을 본다. 우리가 뼈아픈 역사경험을 갖고 있으면서 남을 흉볼 수 있는가?
6. 캄보디아는
캄보디아는 1975년부터 5년간 일어난 대학살(일명 Killing field)은 인구 약 1000만 명 가운데 무고한 시민 250만 즉 인구의 1/4을 학살했다. 지식인(知識人), 자본가, 경제인, 공무원, 판검사, 군인, 경찰, 의사, 엔지니어 등, 피해를 안 입은 가정이 없다.
가장 빠른 최단 시일 내에 완벽한 공산주의를 건설하겠다는 폴 포트 정부가 러시아 식 공산혁명 방법을 채택하여 10대 중반의 어린 학생과 청년들을 교육시켜 공산주의 맹신자를 만들고, 있는 자와 배운 자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 학살을 자행케 했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죽어서 국가를 이끌어 나갈 지식인과 기술인이 없고 학교는 가르칠 선생이 없다.
1960년대는 우리보다도 잘 살고 아시안 게임을 먼저 치른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나라가 지도자의 잘못으로 세계 최빈국이 되었다.
국민의 44.5%가 15세 이하의 어린이로 구성되어 있으며, 빈곤 속에 영양실조와 말라리아, 풍토병, 이질, 장티프스, 결핵,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악성종기 등의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평균 수명이 49세이며, 인구의 60%가 문맹이고 극심한 물자 부족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고 있다.
수도 프놈펜엔 아무런 대책이 없이 무작정 올라온 시골 사람들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빈민촌이고,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의 상태에서 말라리아 모기에 물려 열병에 시달리다 보니 눈에 촛점이 없고, 13세의 나이에 육체적 정신적 성장이 멈추어 버리고, 오염된 강물을 그대로 마시니 수인성 전염병이 돌면 떼죽음을 당하고, 영아 사망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
안경을 쓰고 지식인처럼 보인다고, 손바닥에 고생한 흔적이 없다고 죽였고, 단지 감자를 훔치다 잡혀 도둑으로 몰려 죽고, 감옥에서는 어린아이가 운다고 죽였습니다. 국외로 탈출하려고 비행기를 탔다가 죽음을 당했다.
어린아이는 다리를 잡고 나무에다 쳐서 죽이고, 심지어 공중에 내던지고 총을 쏘아 죽이고, 죽창이나 총검으로 찔렀습니다. 청년을 붙잡아 산채로 간을 빼내어 강장제로 튀겨 먹고, 손발톱을 뽑아 버리기도, 산채로 개미굴에 파묻어 개미 밥이 되게 하기도 했습니다. 죽은 시체도 토막내어 바나나 나무의 거름으로 사용했다.
정치범은 하루 죽 한 그릇으로 굶겨 죽였고, 고문으로 죽고, 독사를 수용소와 감옥에 풀어놓아 물려 죽고, 몇 명씩 포개 넣어 더위에 죽게 했다. 왜 내가 죽어야하는지 모른 체, 이들은 모두 죽어 갔다.
18세도 채 안된 공산주의 남여 맹신자들이 행동대원으로 활동한 이 ''''''''''''''''혁명''''''''''''''''은 가진 자에 대한 한풀이와 혁명방법을 이런 식으로 했다.
7. 결 론.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통일을 이룰 것인가? 답은 한 가지이다.
종북좌익화를 막아야한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따라 대한민국 방식의 통일를 반듯이 이룩해야 한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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