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양양가(襄陽歌)- 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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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찬수 | 등록일 | 2011-01-05 | 조회수 | 4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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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가(襄陽歌)- 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 2011년 1월 1일 아침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파월 참전 기념비 앞에서 "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 같이 죽겠노라!" 이 노래 구절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괴 김일성의 불법남침으로 대한민국이 초토화 될 때 밀리고 밀리던 우리국군이 낙동강 최후 저지선 전투를 극복하고 다시 반격하며 북진할 때 부른 씩씩하고도 장렬했던 조국수호 정신의 군가 한 구절이다. 놀라운 것은 이 군가의 원래 가사 제목은 양양가(襄陽歌)라고 하는데 제목 유래를 찾아보니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린 조선시대 12가사중 하나에서 연유했다는 사실이다. 또 청구영언의 이 가사의 제목 양양가(襄陽歌)는 중국 당대(唐代)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에 연유한다 하니 더욱 놀랄 뿐이다. 그러나 가사 전문과 붙여진 곡과 불리어진 시대는 청구영언에 실은 이백의 시 와는 아주 다르다. 우리 국군이 부른 군가 양양가의 신식 군가는 구한말(舊韓末) 초기에서 부터 불리워 졌다고 한다. 이백의 양양가는 다음과 같다.(고문진보에서 옮겨 실은 글) 落日欲沒峴山西(락일욕몰현산서) : 지는 해 현산 서쪽으로 지려는데 倒著接䍦花下迷(도저접리화하미) : 흰 건을 거꾸로 쓰고 꽃 아래 서성거린다 襄陽小兒齊拍手(양양소아제박수) : 양양의 아이들 좋아라 손뼉치고 攔街爭唱白銅鞮(란가쟁창백동제) : 거리를 누비며 앞다투어 백동제를 노래한다 旁人借問笑何事(방인차문소하사) : 옆 사람이 묻기를 무슨일로 웃는가 하니 笑殺山翁醉似泥(소살산옹취사니) : 산에 사는 노인이 곤죽으로 취하여 웃어 죽겠다네 鸕鶿杓(로자표) : 노자 구기 鸚鵡杯(앵무배) : 앵무 술잔 百年三萬六千日(백년삼만륙천일) : 백 년 삼만 육천 일을 一日須傾三百杯(일일수경삼백배) : 하루에 모름지기 삼백 잔을 마시겠노라 遙看漢水鴨頭綠(요간한수압두록) : 멀리 바라보니 한수는 오리 머리처럼 푸르러 恰似葡萄初醱醱(흡사포도초발발) : 흡사 포도주가 처음 괼 때 같구나 此江若變作春酒(차강약변작춘주) : 이 강물이 변하여 모두 봄술이 된다면 壘麴便筑糟丘臺(루국편축조구대) : 쌓아올린 누룩 더미에 조구대를 지으리라 千金駿馬換小妾(천금준마환소첩) : 천금짜리 준마를 소첩과 바꾸어서 笑坐雕鞍歌落梅(소좌조안가락매) : 비단 안장에 웃고 앉아 낙매곡을 부르리라 車旁側挂一壺酒(차방측괘일호주) : 수레 옆에 한병 술을 매달아 놓고 鳳笙龍管行相催(봉생룡관행상최) : 봉피리 용젓대로 길 가며 서로 권하리라 咸陽市中嘆黃犬(함양시중탄황견) : 함양 거리 위에서 누런 개를 탄식한다면 何如月下傾金罍(하여월하경금뢰) : 어떻게 달 아래 금술잔을 기울이리오 君不見晉朝羊公一片石(군불견진조양공일편석):그대는 보지 못헸는가, 진나라 양공의 한 조각 돌을 龜頭剝落生莓苔(구두박락생매태) : 거북머리 벗겨지고 이끼 끼어 淚亦不能為之墮(루역불능위지타) : 눈물로 또한 떨어뜨릴 수도 없고 心亦不能為之哀(심역불능위지애) : 마음 또한 슬퍼할 수가 없구나 清風朗月不用一錢買(청풍랑월불용일전매) : 청풍명월은 한 푼도 돈 들여 살 필요 없고 玉山自倒非人推(옥산자도비인추) : 옥산은 사람이 밀어버리지 않아도 절로 거꾸러진다네 舒州杓(서주표) : 서주 구기 力士鐺(력사당) : 역사 노구솥 李白與爾同死生(리백여이동사생) : 이백이 너와 함께 생사를 같이하리라 襄王雲雨今安在(양왕운우금안재) : 양왕의 운우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江水東流猿夜聲(강수동류원야성) :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원숭이 밤 울음소리 들려오네 그러나 조선조 말기 구한말(舊韓末)즉 우리민족의 치욕의 한일합방 그 이전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불리어진 현대식 군가 양양가는 아래와 같다. 인생(人生)의 목숨은 초로(草露)와 같고 이씨조선 오백년 양양(襄陽)하도다 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 아~! 이슬 같이 죽겠노라. 이 양양가가 6.25때는 다음과 같이 우리국군에 의해서 군가로 불리웠다. 인생(人生)의 목숨은 초로(草露)와 같고 조국(朝國)의 앞날은 양양(襄陽)하도다 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 같이 죽겠노라. 나는 이 양양가를 1950년 10월 이후 10살 때 부터 나의 고향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복골 에서 들었다. 우연의 일치 이지만 노래 제목이 나의 고향 지명 양양(襄陽)과 똑 같았다는 사실이다. 1951년 11월 이후 당시 우리 국군은 중공군의 북괴지원 참전으로 북진기세가 주춤해져 후퇴 일로에 있다가 중부전선 전역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을 때이다. 이때 우연하게도 우리마을 사람들은 국군과 함께 총알이 빗발치듯 하는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살았다. 그러나 멀찌기서 국군이 진격하면 간단한 보따리 싸 들고 속초 간성지역으로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듯 피난을 갔고 인민군과 중공군이 무섭게 쳐 내려 오면 우리마을 사람들은 허둥지둥 강릉쪽으로 정신없이 도망을 갔던 시기이다. 전투는 이곳 저곳에서 치열했고 들판은 죽은 사람들의 안타깝고도 처절한 모습으로 여기저기에서 아무렇게나 나 뒹굴어 슬프고도 놀랍기만 했다. 사람들은 통곡소리를 낼 겨를도 없이 내일이 어떻게도 되는지도 모르고 종잡을 수 없는 처신들을 하였다. 쫒기는 가운데서도 얼굴 낮선사람 만나면 서로가 경계를 했고 다친사람 만나면 어디서 왔느냐고 따지지도 않고 서로들 부축여 주면서 아픈 상처를 싸매주며 따뜻하게 위로를 했다. 그리고는 서로들 자기갈 길로 떠나 갔다. 나는 우리국군의 진정한 호국 정신을 이때에 만났었다. 전투가 치열한 뒷산 소금재 고개너머 넘은들 쪽으로 우리국군 아저씨들이 중무장을 하고 전투에 투입 될 때 나는 아저씨들이 씩씩하게 부르는 양양가를 그때에 들었다. 전투에서 이길지도 질지도 모르고 생사여부가 모호한 일촉즉발의 현장에서 내게는 형(兄) 같은 젊은 아저씨들이 한손에 총을 들고 어린 나의 빡빡깎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다치면 큰일이라고 말 하면서 어서 어른들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가라고 하였다. 이담에 공부 열심히 하여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당부의 말도 따뜻이 남겼다. 그리고는 대오를 따라 군가를 부르면서 적진으로 무섭게 돌격하였다. " 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바로 목숨이 왔다 갔다 생사의 첨단의 순간에 우리 국군들이 이렇게 씩씩한 군가를 부르며 우리나라 대한민국과 국민들인 우리를 지키려고 적군 진지를 향해 돌격 앞으로 하며 치달아 갔던 것이다.우리는 강릉쪽으로 허겁지겁 피난을 갔고 우리가 사는 마을이 수복되어 이젠 안심된다 하여 다시 8월 말 이후 고향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그러나 짧은 기간동안 이었는데도 고향은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하복골 대 왕고모 할머니댁이 살던 과수원께 관덕정은 훈련사령부가 들어 섰고 강현의 전역과 이후 비행장으로 닦여진 장산리(짐미)와 정승골과 송암산께는 전부 전투 훈련장으로 바뀌었다. 제주도 훈련소에서 갓 투입된 신병들이 밤낮없이 실제 전투와 똑 같은 훈련을 받으면서 부르는 군가는 어저께 부르던 아저씨들의 군과와 씩씩하게도 조금도 틀리지 않게 똑 같았지만 군가 부르는 오늘의 아저씨들의 얼굴 면면은 어제의 아저씨들과 달랐다. 훈련받는 아저씨들도 먼저와 같이 또 전방에 투입되고....그때의 소금재 고지를 넘던 아저씨 모두들은 전투장에서 어떻게 된 것일가....! 아마도 승전으로 무사하길 바랐었지만 25년 세월이 지난 뒤 나는 우리국군의 현충원 동작동에 학생들 인솔하고 공원묘원 정화활동하며 하얀국화 한송이를 전사자 묘비앞에 놓으려 참배하러 갔을때 6.25때의 아저씨들의 씩씩한 얼굴과 우렁찬 군가가 떠올라 목이 미어지게 콧날이 시큰해 지며 지금까지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떠 오르는 고마움과 아리면서도 가슴 찢어질듯 안타까운 슬픔은 어이한 것인지....! 2010년 작년 12월 20일 나는 몇년전 부터 알고 지내던 월남에 참전했던 어제의 용사들의 뜻 깊은 제안을 받았다. 2010년 12월 31일과 2011년 1월 1일 아침을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월남파병기념관" 오른쪽 옆에 세워진 "월남파병용사 추모비(越南派兵勇士追慕碑)" 제단 앞에서 영령을 위한 진혼제 계획을 알리며 참석해 주기를 기대하는 제안이었다. 명심한 며칠 뒤 춘천에서 오음리 까지는 아주 가까워 12월 31일 오후 3시 09분 나는 미리 도착하였다. 참전 기념관 앞에서 내려다 보는 간동면 일대는 마침 이틀 전 부터의 혹한속에 함박눈이 내려 온천지가 오봉산과 배후령과 용화산으로 하얗게 둘러싸여 마치 설국의 형상 이어서 이 고요한 눈경치를 바라보며 파월 참전 용사들을 기다렸다. 드디어 저 아래로 부터 천천히, 4시 50분경 여러대의 차량으로 탑승해 기념관으로 줄을 지어 서서히 올라오는 어제의 세계평화 참전대열의 자랑스런 우리국군 파월장병의 씩씩한 기상 대열을 보았다. 위기에 놓인 산간 벽지를 구출하려 작전개시 중인 1951년 우리국군의 한겨울 이동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강원도, 충청남북도, 서울, 경기도 일원 그리고 멀리 강화도에서 까지 마음속으로 완전무장한 애국지사들의 모여드는 엄숙한 모습이었다. 월남참전 전우들의 반가운 만남 뒤 흥분한 음성의 회고 대화는 밤을 새면서 이어졌다. 서로 서로가 처음보는 얼굴도 있었지만 나라사랑과 공산만행을 분노하여 응징하는 이상이 한결같이 같기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