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사이렌을 찾아가시오. 이 자들은 누가 오던지 모두 홀리는 것이오. 누구나 멋모르고 가까이 가서 사이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돌아가 처자를 볼 생각도 없고, 자식이 와도 기쁘지 않지요. 사이렌족들은 풀밭에 앉아 그 고운 목소리로 사람을 홀리는데, 거기는 온통 사람들의 뼈가 산더미처럼 쌓였지요. 죽어서 썩으면 뼈에 붙은 살들이 없어져버리는 것이지요. 배로 여기를 통과하시오. 맛있는 꿀초로 반죽을 해서 일행의 귀에 모두 틀어막고, 아무도 그 노래를 듣지 못하게 하시오. 혹 당신이 들어볼 생각이 있다면, 부하들을 시켜 사지를 배 마스트에 똑바로 잔뜩 묶어놓으면, 사이렌의 노래를 들을 수 있지요. 그래, 혹 당신이 부하더러 끌러달라고 원하게 되거든 더욱 더 매듭을 지어 잡아매도록 하시오.\r\n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중 키르케가 오디세이에게 전한 말.\r\n \r\n 송두율 교수가 16일 법정에서 자신을 그리스신화의 영웅 오디세이에 비유했습니다. 12월17일자 동아일보에 인용된 그의 발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r\n “오디세이는 자신을 꼬드기는 요정 사이렌의 유혹에서 벗어나 조국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돛에 묶었다. 나 역시 독일에서의 성과에 자족하지 않고 오디세이의 심정으로 분단된 조국에 대한 관심 속에 37년을 살았다.”
송 교수는 현학적 수사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분명 학자적 엄밀성이 결여돼있습니다. 오디세이가 돛에 자신의 몸을 묶은 것은 조국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이렌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의 귀는 모두 밀초로 막아버리고 혼자서 사이렌의 목소리에 맞섰던 것입니다. 그것을 마치 귀향을 위해 무릎 쓴 고행처럼 묘사하는 것은 잘못된 비유입니다. 차라리 사이렌 보다는 오디세이에게 영원한 생명과 권력, 재물을 약속하며 7년이나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님프(요정) 칼립소에 비유했더라면 더 적절했을 겁니다.\r\n
송 교수의 이런 엄밀성의 부족은 소위 그의 ‘내재적 접근법’에 대한 설명에서도 발견됩니다. 송 교수는 90년 초반 북한의 사회주의 이념과 현실을 그 내부로부터 이해하자는 ‘내재적 접근법’이 북한에 대한 비판성을 결여했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돌연 내재적이란 용어는 칸트철학에서 원용한 용어로 경험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반대어는 ‘외재적’이 아니라 ‘선험적’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발언은 그럼 내재적 접근법 이외의 ‘전체주의 모델’이나 비교사회주의적 접근 등은 모두 ‘우리인식의 경험 가능한 영역을 넘어 선다’는 뜻이냐는 반발을 낳았습니다. \r\n
그럼 칸트가 설명한 ‘내재적’(immanent)과 ‘선험적’(transcendental)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최근 한 교수님의 도움으로 이 개념에 대해 눈을 뜨게 됐습니다. 내재적이란 말은 우리가 직관(감각)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경험세계를 지칭한 것이고 선험적(‘초월적’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이란 말은 우리의 직관으로는 인식할 수 없지만 그 존재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시간과 공간 같은 인식의 범주를 지칭한 것입니다.
조금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웠던 칸트의 저 유명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사유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r\n 칸트의 이 말은 당시 철학의 양대 산맥이었던 관념론과 경험론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칸트는 독일 관념철학의 적자였지만 경험론과 관념론의 종합을 꾀했던 철학자였음을 기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를 바탕으로 거칠게 얘기하면 내재적은 경험론의 인식세계(사유 없는 직관)에 대한 표현이고, 선험적은 관념론의 인식세계(직관 없는 사유)를 말합니다. 인간의 경험적(감각적) 인식만으로는 입증이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사유 속에 보편적으로 자리 잡는 추상의 범주가 있습니다. 따라서 경험적 인식은 선험적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가능합니다. 우리 속담에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칸트의 개념을 주입하자면 소는 ‘내재적 인식’이고, 언덕은< |